시선이 닿기도 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세계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의 에너지로 가득 차있다. 이 에너지는 시선이 시작된 인간–존재에 내장되어 있는 서사결핍으로 인한 긴장–떨림 즉, 불안의 정서와 그것을 감각의 다발 끝으로 소환하여 신기루처럼 피워 올린 공포가 존재의 외부로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무상성과 불확실성을 뿌리로 자라 난 세계는 인간–존재의 경계에 끊임없이 부딪치며 내부의 긴장–떨림을 배가시키고 불안과 공포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생성되게 한다. 이 에너지는 인간–존재가 구동하게 하는 근원이며 무한한 동력이다. 나의 작업은 불안과 공포의 에너지로 가득 찬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던져진 부조리한 인간–존재의 행동 방식(M.O.-Modus Operandi)에 대한 기록이다.

무상하고 불확실한 것들의 덩어리-세계에 던져진 인간-존재는 그 발생부터 내장된 서사결핍을 전제로 하는 부조리의 상태이다. 알 수 없는 근원과 목적은 발생에 전제하는 원죄이며 이러한 불완전함의 선언을 내포한 인간-존재는 의식의 기저에 출렁이는 긴장-떨림을 딛고 선 불안한 존재이다. 인간-존재 내부에 똬리를 튼 불안의 정서는 그 움직임이 내부에서 머물지 않고 감각의 다발 끝으로 소환되어 공포를 조립해낸다. 감각의 다발 끝은 그 존재의 경계이며, 발생 이후 생의 가운데에 언제나 스스로의 근원에 대한 부조리를 대면해야 하는 인간-존재가 파멸로 귀결되지 않으려는 내부의 관성과 존재 밖의 외부 세계가 충돌하는 대지이다. 인간-존재와 세계가 충돌하는 매순간 그 곳에 일렁이는 신기루가 피어오른다.

불안과 공포는 인간-존재가 최소한의 현상적 자아를 벗어나는 순간에 가장 먼저 스스로 포착해낸 정서이다. 그 것은 최초로 내부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시선을 따라 도달한 외부 세계에서도 들이닥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해 할 수 없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그냥’ 있는 것들. 시선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모든 존재 밖의 존재. 얼굴 없는, 제거되지 않는 적들의 꿈틀거리는 공세.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매순간 새롭게 일어서는 무상성이 지르는 불안한 함성 그리고 그 메아리처럼 인간-존재의 내부에서 솟아난 부조리의 머리가 입을 벌려 내는 균열의 소리는 기저에서 출렁이는 긴장과 떨림을 증폭시키며 충돌하는 대지에 피어오르는 공포를 더욱 강렬하게 촉발시킨다. 알 수 없는 근원과 목적을 원죄로 안고 세계로 나온 인간-존재의 부조리와 함께 매순간 이것을 더욱 상기시키는 불안과 공포의 근원들은 아마도 인간-존재가 대면한 가장 강력한 적이자 최초의 악이었을 것이다.

이제껏 인간-존재는, 발생 이후 지금껏 제거되지 않고 있는 이러한 적-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흩어진 것들을 모아 관념화, 추상화하고 스토리텔링을 부여해왔다. 이것은 알 수 없는 근원과 목적-결핍된 서사를 채우고, 무상성과 불확실성의 뿌리에서 자라난 세계를 납득 가능한 범위의 대상으로 수정, 조정, 치환하는 사건이자 일종의 의식이다. 의식 속의 모든 이름과 스토리텔링과 추상된 것들은 인간-존재 개인의 서사가 되어 내장된 서사결핍을 잠시나마 채우며, 무상하고 불확실한 외부의 세계를 명증한 무엇인가로 보이게 만드는 거대 서사를 직조하는 재료가 된다. 이제 비로소 장막 뒤에 숨어있던 얼굴 없는 적에게 씌울 가면이 만들어지며, 제거되지 않던 ‘얼굴 없는 적’들은 이 의식 속에서 선명한 투쟁의 대상으로 치환 된다.

인간-존재의 행위들, 스스로 되고자 한 구체적 대상들 혹은 이룩한 모든 것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를 수정, 납득 가능한 구조-세계로 치환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노력과 그 결과물이다. 우리는 모두 불안과 공포를 기반으로 한 욕망의 구조 위에 서 있으며 분주히 그 구조를 수정, 조정, 가공, 보완, 보강하는 일에 열중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얼굴 없는’ 적과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내장된 서사결핍에 의해 의식의 효력은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 될 수밖에 없다. 의식이 솟았다 가라앉는 주기마다 인간-존재는 의식의 효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다양한 토템을 만들어내고, 의식을 수행하는 전략-전술을 다양한 방향으로 진보시킨다.

이 의식은 근원과 목적의 결핍을 잠시나마 메꿔주며 자신과 세계를 채운 불안과 공포의 오목하고 볼록한 에너지의 진동을 타 넘어 인간-존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한동력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 의식은 인간-존재의 실존이 발생되어오게 만든 최초이자 마지막 사건이며, 시작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의 상태일 것이다. 자신의 꼬리를 문 채 끝없이 자라나는 몸통을 계속해서 먹어 들어가는 주름진 뱀과 같이.

나는 그럴싸하고, 틀에 박힌, 겹겹이 덮여있는 것들을 걷어낸 가장 아래에 있을 원초적인 사건적 의식과 이 의식으로 획득되는 다양한 토템들과 의식 속 인간-존재의 양태를 기록하고 싶었다. 오랜 시공간의 이동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이 원초적 사건들과 주름에 낀 사건의 찌꺼기들, 그 안에 우리가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인간-존재의 실존적 모습과 세계가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존재의 내장된 서사결핍-부조리와 무상성, 불확실성에서 뻗어 나온 외부세계로 투사되는 공포로부터 야기된 이 사건적 의식과 토템, 그 것을 다루는 인간-존재의 행동방식(M.O.-Modus Operandi)을 획득-기록하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이미지 호딩’이라 이름 붙인 방식으로 재료가 될 이미지들을 주워 모은다. 선전/광고물, 잡지, 책 속의 삽화나 사진, 영화 속 장면들,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인물들,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 수 많은 세계의 모습들(어쩌면 이미 누군가가 진행한 의식의 모습이거나 행동 방식 혹은 의식의 과정 안에 있던 토템일 수도 있는 것들). 인간-존재의 공통적 무의식-기저의 욕망, 결핍, 원초적 불안과 공포, 투쟁-저항, 사건적 의식, 토템 등이 ‘조짐’의 형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어디든 들러붙어 있다. 조각들은 즉각적-즉흥적이고 때론 오랜 숙고 끝에 얻어진다. 조금 털어내고, 조금 갈아내고, 또 조금 깎아내다 보면 그 안에 내장된 원초적-최초이자 마지막-사건의 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후의 작업은 마치 고생물학자가 고작 몇 십 개의 뼈 조각을 통해 공룡의 복원된 모습을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 적당히 그러하여 보이는 지점에 조각들을 배열하고 이어지지 않는 조각의 사이는 인간-존재로서 세계를 통해 매일 같이 부메랑처럼 돌려받는 불안과 공포, 내적 결핍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떨치고 싶은 나-개인의 욕망을 쑤셔 넣어 채운다. 그리고 하나의 명증한 사건(처럼 보이게)으로 일으켜 세운다. 비록 얼마 안가 이 자기기만적 판타지-서사는 허물어지고 또 다시 다르면서 동일한 행위를 시작해야겠지만.

이와 같이 만들어지는 회화-화면은 불안과 공포의 에너지로 가득 찬 세계, 그 세계와 마주선 인간-존재의 행동 방식(M.O.-Modus Operandi)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얼굴 없는 무상한 세계에 가면으로 씌울 토템을 만드는 나-개인의 의식(행동 방식(M.O.-Modus Operandi))이 된다. 획득된 회화-화면은 외부의 불안정한 세계를 납득 가능한 수준의 불안정함으로 조정해주는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하며, 이미지-조짐들로 가득 찬 호더의 창문 없는 방에 걸린 관념적 풍경화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방안의 시선은 그 풍경을 통해 세계를 보며 언젠가 효력이 다 할 순간을 위해 또 다른 조짐들을 모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